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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53 [ep.12]일기 2023. 4. 9. 19:53
제목 없음
심신이 정말 제목 없음이다. 야근에 야근에 야근에 야근에 야근에 근 2주 동안 모든 루틴이 파괴되었다. 회사 업무에 시달리면 조그마한 영양제 몇 알도 먹지 않는다.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올려두곤 하지만 이상하게 눈이 가질 않아. 운동은 개나 줬다. 그래 항상 이런 것들이 문제였고 무수히 많은 변화 속에 균형을 지켜가며 올곧게 서있을 줄 알았건만 이번에도 바빠지니 금세 버튼을 눌러버렸다.
살면서 느끼는 거지만 술과 야식은 무기력의 씨앗이다. 간혹 바쁜 프로젝트 와중에 저녁 끼니를 거를 때가 있고 집에 와 삶의 노곤함을 풀며 배달음식을 먹거나 반가운 약속에 술 한잔 빠질 수 없으니 두 잔 세 잔 먹다 보면 다음 날부터는 피부도 엉망이고 배는 늘어지고 지쳐버리게 된다. 바로 이곳에서 선택을 잘해야 하는 것이 즉각적이고 빠른 쾌락을 얻고자 한다면 누워서 그 버튼을 누르면 될 것이고, 다시 계단 밟듯 서서히 힘을 주며 나아가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한다. 다만 그 버튼이 너무 내 코앞에 있단 말이지!
글쎄 주 5일 근로자 친구들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. 이는 단순히 와 금요일밤부터 와장창 놀아야지! 하는 그 어린 쾌락이 부럽다는 건 아니고 주말이라는 불변의 고정적인 텀을 활용하여 리프레시를 한다거나 자신을 바로잡을 그 여유가 부럽다는 것이다. 평소엔 주 6일 격주로 돌아가거나 바쁜 프로젝트에 몸담게 되면 주 7일도 서슴지 않는다. 앉아 있는 시간은 어찌나 많은지. 퇴근하고 주차한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갈 때 다리가 퇴화되는 불쾌한 느낌에 줄곧 기분이 잡쳐버린다. 24시간 헬스장을 끊어야 하나. 우리 집 옷방에 작은 매트 하나 깔고 땀 흘리는 게 너무 편하고 좋아서 아마 벗어나진 않을 것 같다. 그나저나 맨몸운동이 제일 매력적이야.
오늘은 일요일. 부족한 수면을 취하느라 오후 1시에 일어났다. 어찌나 산 타기가 싫었던지 산 중턱에 올라가도 내려갈까 수 없이 고민했을 정도. 그 무기력의 씨앗을 불태우고 발로 짓밟기 위해서는 등산이나 냉수마찰만큼 좋은 것이 없다. 아 오늘 존나 운동도 귀찮고 눕고 싶다 씨발 이럴 땐 찬물로 샤워한 바가지 하면 새양말을 신고 밖에 나가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. 진짜 추천하는데 진짜 개 싫다. 그나저나 일기장을 보면 무슨 예민한 고투더뻑킹짐 헬창인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아. 열두 시간 넘게 의자에 쳐 앉아 거북목 쭉 뻗어가며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이 일하는 이런 사무직 찐따가 이 정도로 체력관리하는 나 자신 칭찬해. 할 수 있을 때까지 내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야지.
그렇게 정상에 올라섰고 눈앞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도 전에 절벽 부근에 걸터 누워 눈을 감았다. 바로 위로는 뜨거운 태양 빛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지 컴컴하다기 보단 그 얇은 눈꺼풀을 관통하는 햇빛에 그저 밝은 자몽색만이 비추어졌다. 산속을 훑고 바위더미를 올라선 그 매서운 바람소리는 도로 위 달려대는 차갑고 지저분한 소음과는 또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. 등줄기에 흘렀던 땀은 금세 식어 산바위 맞닿았고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지 세상 모든 중심이 내 발아래 놓인 듯했다. 아주 짧았지만 누구보다 높게 올라선 듯했다. 몸을 일으키자 값비싼 테크놀로지 고어텍스 무리들이 내 주변에서 셔터를 눌러댔고 더 이상 눈살을 찌푸리기 싫어 곧장 하산했다.
봄날 따스한 기운을 온몸에 감아 오르는 산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. 그래서 그런지 오르고 내려갈 때 아름다운 풍경들을 사진에 담았지만 그것들에서 오묘한 차이를 발견 할 수 있었다.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. 폭풍 같은 일생을 거침없이 오르다 보면 저 수풀 너머로 화려하고 예쁜 풍경이 나를 부르지만 오르고자 하는 길을 크게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. 길을 잃을 수도 있거든. 저 수풀 너머 나를 반기는 그 무언가의 풍경은 세월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을 테니. 지금은 오르는 것에만 집중하자. 뭐 오르다 보면 길을 달리하지 않아도 꽃 한 송이 하나쯤은 나를 반기고 있겠지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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